
국내 자동차 디자인계의 원로격 인물이 직접 차린 자동차 디자인 미술관이 처음 개장되었다고 하여 방문해보았습니다. 이름은 Forms Of Motors and Arts의 줄임말인 FOMA. 설립자인 박종서 교수님은 1979년 현대차에 디자이너로 입사했고, 한국인 최초로 영국 RCA(Royal College of Art)에서 운송디자인을 공부하여 스쿠프, 티뷰론, 싼타페SM 등 국산차 역사에서 큰 획을 그은 차들을 그려냈습니다. 현대차 디자인연구소 부사장 직책을 마지막으로 퇴사한 후 국민대에서 디자인을 가르치고 있는 박종서 교수님의 디자인에 대한 철학을 엿볼 수 있는 공간입니다.


주차장 외벽에 무심한듯 걸려있는 레이스카의 외형과 목형.

미술관 입구엔 "갑옷과 자동차"라는 작품이 걸려 있습니다. 한 세기 전 금속을 조련해 갑옷을 만들던 장인들은 화약 등 현대 무기 발달에 따라 갑옷이 필요없어지게 되자 자동차 외형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이런 역사를 표현한 작품입니다. 알루미늄 판 위에 에칭 기법으로 세밀히 그려낸 것이 매우 멋집니다.


포니 동판 아트워크. 현대 포니1의 도면을 바탕으로 동판을 망치로 두들겨 만들었습니다. 일부러 산으로 부식시킨 표면에서 묘한 멋이 느껴집니다.

내부 전시공간에도 포니에 대한 전시품들이 또 나올텐데, 박종서 교수님의 포니에 대한 애정은 정말 남다릅니다. 포니의 과거를 보존하고자 동판을 비롯해 도면, 목형 등 다양한 형태의 기록유산들을 직접 만드셨습니다.



자동차 클레이 모형. 신차 개발 단계에서 디자인 검토를 위해 만들어집니다. 그냥 찰흙같아보여도 실제 등화 부품을 끼우고 금속 표면 느낌으로 외형을 입히면 진짜차와 흡사한 느낌이 납니다.



빠른 검토를 위해 만들어지는 축소 클레이모형. SUV는 딱봐도 스포티지QL인데, 세단형 차는 개발중인 미공개 신차 중 하나같네요. 몇달전 목격한 IK와는 윈도라인이 너무 다르고..


티뷰론이 올려진 네모진 판은 정반이라는 설비입니다. 완벽한 수평 상태 위에서 자동차를 디자인, 설계하기 위해 쓰인다고 하네요.


20년 전 차라는게 무색할 저도로, 정말 흠잡을 데 없이 멋진 티뷰론. 역동적인 굴곡을 뽐내며 국산차 금형기술 발전을 널리 알리게 되었죠.


박종서 교수님의 디자인 철학은 자연주의입니다. 각도에 따라 오묘한 색 변화를 내는 티뷰론의 특수 카멜레온 페인트도 야생의 곤충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죠.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전시공간을 살펴볼 시간.


LF쏘나타의 화이트바디. 화이트바디(또는 BIW)는 자동차의 기본 골격입니다. 박종서 교수님은 이 화이트바디를 동물의 두개골에 비유하십니다. 생존을 위해 빨리 달려야 하다보니 앞코가 날렵하게 뻗게 되며, 사고로 부딪히게 되는 경우 코로부터 충격을 흡수하여 생존 확률을 높힐 수 있는 구조로 두개골이 발달해왔는데, 자동차 역시 이와 같은 구조라는 것이죠.



현대 HCD-1 컨셉트. 오리지널 레진 색상을 그대로 살려 재현했습니다. 굴러가지 않아도 되고 어떻게든 출품할 차를 만드는게 목적이었다보니 실물 HCD-1 컨셉트엔 빈약한 포니 엔진을 그대로 얹었다던가 하는 웃픈 과거가 있었더군요. 그래도 HCD-1이 나올 당시 현대차는 디자인 단계에서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상상력이 마음껏 발휘되도록 배려한 환경이 보장되었기에 20세기 한국차 디자인 역사의 중요한 한 축이었던 티뷰론의 모태 컨셉트가 이렇게 나올 수 있게 된 것이죠.

현대차 퇴사 후 리프레시를 위해 이탈리아에 머물던 중 박 교수님은 카로체리아들이 손으로 두들겨 만들었던 올드카에 심취하게 됩니다.


철사를 이어붙인 틀 위에 금속판을 망치로 두들겨 외형을 만드는 카로체리아들의 작업환경을 재현한 곳입니다. CAD나 설계프로그램이 없던 80여년 전 시절엔 장인들의 손과 망치로 아름다운 차들이 만들어졌죠. 지금도 카로체리아들이 일부 남아있긴 하지만, 힘들고 고된 일이다보니 후대 양성이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1939 아우토 유니온 타입D



1938 알파 로메오 8C 2900B 밀레 밀리아 로드스터



1958 페라리 250 테스타로사
박 교수님이 직접 철사 형틀을 짜서 금속판을 두들겨 만든 세 종의 작품들입니다. 역대 페라리 중 가장 아름다운 차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250 테스타로사의 경우 원 디자이너 故 세르지오 스칼리에티의 아들 오스카 스칼리에티를 찾아가 조언을 들으며 위의 재현 조각품을 만들었습니다.
페라리 250 테스타로사를 자세히 보면 휘어진 긴 철사가 올려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박 교수님은 차체 표면에 철사를 직접 갖다대며 이렇게 말씀하셨죠
"세상엔 직선이란 것은 없어. 모든 선은 중력에 의해 휘어지거든. 자연스러운 휨의 원리를 이용해 제대로 된 도면도 없이 두 손과 감각만으로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도 완벽한 디자인을 구현한 것이지"
불필요한 겉치장이나 장식 없이 아름다운 곡선미를 뽐내는 클래식카들의 디자인엔 자연에서 찾은 원리와 장인들의 노력이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절로 경의감이 들더군요.

포니를 그렸을 때 썼다던 독일제 제도기



박 교수님이 시간 날때마다 계속 작업 중이신 포니 목형. 현대차도 갖고 있지 않은 포니 도면을 찾아 이탈리아로 날아가 주지아로에게서 직접 청사진을 구해 도면을 재현해냈고, 이를 기반으로 다양한 형태의 포니의 보존 유산들을 직접 만들어나가고 계십니다.






호랑가시나무잎, 앵무조개는 실물보다 훨씬 큰 크기로 확대모형을 만들어두셨습니다. 앵무조개의 단면에선 피보나치 수열의 원리와 황금비율의 아름다움을 느껴볼 수 있었죠. 박교수님은 아름다움이란 멀리갈 필요 없이 세상 만물의 "꼴(form)"에서 찾을 수 있는데, 컴퓨터 프로그램에 매달려 마우스 클릭밖에 할줄 모르는 디자이너들에 의해 자동차 디자인이 획일화되어가는 작금의 디자인 추세에 내내 탄식하셨죠.



제가 방문했을 시점은 9월이었는데(때문에 알루미늄테이프가 안 붙어있는 상태..),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아서인지 주말에 방문했는데도 불구하고 관람객은 저 혼자뿐이었습니다. 마침 미술관에 나와계시던 박종서 교수님께 1:1로 전시품들의 설명을 들으면서 자동차 디자인과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터득하게 된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일산에 위치한 FOMA 미술관은 찾아가기 매우 힘들게 되어 있습니다. 이곳의 주소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향뫼로 91" 를 내비게이션에 찍으면 공사현장이 뜰텐데, 당황하지 마시고 현장 언덕을 따라 쭉 올라가신 뒤 갈림길에서 우회전하여 비포장도로 언덕을 타고 계속 올라가시면 붉은 외벽의 FOMA 미술관을 발견하실 수 있습니다.
FOMA 미술관은 규모는 생각보다 작았지만 박종서 교수님의 디자인 철학과 열정을 체험해보기엔 결코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이곳에선 자동차 디자이너를 꿈꾸는 분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 루키 디자이너들의 창작품들을 한데 모은 플리마켓, 그리고 가장 중요한 포장도로 진입로를 통한 접근성 개선을 차차 준비 중이라 하니 앞으로도 더욱 기대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ADSENSE|ca-pub-7629890225161729|6284599891|1|728px|90px#]